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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하프 위크; Nine and a half weeks (1978, 엘리자베스 맥닐)

flyfanny 2014. 2. 2. 22:14



 어느 날 도서관에서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을 고르고 있었다. 인문학 서적도 자기계발서도 아닌 소설책이 문득 읽고 싶어졌다. 그것도 지금 내가 부딪히고 있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런 이야기. 어쩌면 찐한 로맨스 이야기. 그러런 중 아주 얇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한두 문장을 읽자마자 같이 책을 고르던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결정했다고.

 

 <나인 하프 위크>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처음 같이 잤을 때 그는 내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못 움직이게 했다. 두 번째 때는 내가 옷을 벗다가 바닥에 떨어뜨린 스카프를 집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의 눈을 가려도 되겠어요?” 그게 좋았다. 난 그가 좋았다.

 1978, 엘리자베스 맥닐(필명)이 출간한 단 한 권의 책으로 그녀가 뉴욕에 거주하면서 겪은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회고록 형식으로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하지만 이는 내가 찾던 찐한 로맨스 소설보다 훨씬 강렬했다. ‘은밀한 욕망이라는 표현을 뛰어넘는, 은밀하지 조차 않은 둘의 그것이 제대로 드러나는 순간 거부감이 들 정도로 강렬했다. 두 남녀의 관계는 이런 식이다. ‘부엌 조리대에 놓인 채찍, 식당 문고리에 걸린 수갑, 침실 구석에 던져진 얇은 은색 쇠줄그야말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보통의 소설과는 차이를 보이며, 그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200 페이지 남짓의 분량만큼이나 이야기 또한 무겁지 않다. 둘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와 그녀의 감정, 배경만 묘사될 뿐 그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과감하게 생략한다. 그의 양복이 색깔 별로 몇 벌이며 양말은 몇 켤레인지 나열하지만, 정작 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라고 하는 책의 주인공, 그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책의 2/3를 읽고 나서야 그녀의 가슴이 매우 작다는 것을 알고, 누군가는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친구를 만나고, 회사에 출근을 하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의 침대 위에서.

 끝까지 둘의 관계를 두고 사랑이라 표현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그녀를 위해 머리를 감겨주고, 옷을 입혀주고, 음식을 먹여주었지만, 그만큼 그녀는 무릎을 꿇고, 뺨을 맞고, 방바닥을 기어야 했다. 이처럼 낮 동안의 매력 있는 커리어 우먼은 밤이 되면 무기력하고 의존적이고 완전한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관계 안에서 그녀는 자기 삶의 방관자가 되는 쾌락적인 호사에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사랑을 하고 싶거나 하기 싫은 기분은 책에서나 본 기분이었고,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을 했고, 나는 늘 결국은 절정에 달했다. 전주곡만 다양할 뿐이었다.적어도 이해는 하나 공감은 하지 못하겠는 둘의 관계, 이해조차 못하겠는 그 가 아닌 그녀의 변화. 그러다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이 모든 관계와 변화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그들의 관계는 극단적으로 표현됐을 뿐 결국 사랑에 대한 본질을 탐구한다.

 그리곤 책의 제목을 새삼스레 다시 떠올려 본다. Nine and a half weeks, 9주일 하고도 반. 제목에서부터 이미 둘의 관계에 끝이 존재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녀는 가 아닌 그녀 자신을 보게 된다.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 그 남자를 사랑했던 그녀. 통제력을 잃고 자아를 외면했던 9주일 반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변해버린, 어쩌면 감춰두었던 자아그와의 관계 이후 침대 시트 위에 번진 그녀의 피를 다시 마주한다.

 그녀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고, 둘의 관계는 끝을 맺는다. ‘다음 날 시작된 치료는 몇 달간 계속되었다.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라는 단 두 문장을 통해. 그녀는 다른 남자랑 다시 잠을 잤고, 책임감을 되찾아 밤이나 낮이나 다시 어른으로 살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표현대로 감각의 온도 조절기가 망가진 채. 뜨거웠던 그와의 관계가 끝나고 몇 년이 흘러서도 그녀의 몸은 미지근한 정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다(fall in love)’라는 말이 있다. <나인 하프 위크>는 그 말의 위험을 되새겨 준다. 그리고 동시에 그 묘한 환상에 다시금 빠지게도 만든다. 강렬한 사랑은 강렬한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책 속의 그녀처럼 짙은 매질자국이 될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진한 가슴 속의 피딱지가 될 수도 있으며, 고장 난 감각의 온도 조절기로 표현될 수도 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을 누구도 강요하진 않는다. 무릎을 꿇든 가방을 들고 그 집을 나오든 그건 각자의 판단이고, 책임이다. 우린 그저 마음을 헤집는 파도와도 같은 그것에 빠질 뿐이다. 헤엄쳐 나오는 것도 그저 잠겨버리는 것도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 채로.